임진왜란 임박한 상황..
일본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후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는 조건으로 망망한 현해탄을 건너 당장 조선에 쳐들어올 만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
조선이라고 눈치 채지 못할리가 있는가? 당시 세력이었던 서인과 동인에서 각각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파견하여 정세하고 돌아와서 정세를 보고하는데 정사로 간 황윤길은 왜인이 필연코 쳐들어올 것이라 적극 주장하고, 부사로 함께간 김성일은 왜인은 절대로 조선을 침범하지 못한다고 호언장담했다.
뿐만아니라 왜국의 도요토시 히데요시가 중 겐소를 통해 조선에 보낸 글월 속에. "조선을 거쳐서 명나라를 치러 갈 터이다" 한 사실을 중국 명나라에 기별해야 좋으냐 안 해도 무방하냐 하는 어전회의가 당파간의 의견이 엇갈려 의논만으로 석 달이나 허비해 끌었다....
임진란 발발과 진행상황
조선 개국 후 정확히 200년 이 지난 1592년 4월 12일 일본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선 7백여 척이 까맣게 부산 바다를 향해 쳐들어온지....2주가 지나서 4월 20일에 왜군은 탄금대를 넘는다..
처음에 도순변사 신립이 선조의 명을 받아 한양으로 올라오는 왜군을 막으로 충주에 다다르니 모여든 군사 수효는 8천여 명이나 되었다. 조선이라고 인물이 없을까..
종사관 김여물이 신립이 충주에서 더 나가지 않는 것을 보고, 장군께서는 빨리 높은곳에서 적을 막아 낸다면 우리는 비록 8천의 군사를 가졌다 하나, 한 사람이 능히 열명의 적을 막아 낼 수 있으니 8만 대병을 막아 낼 수 있으니, 빨리 문경으로 내려가서 새재를 지키십시다.
신립이 말한다 "자네가 모르는 소릴세, 왜놈들은 걸어오는 보병이고 우리들은 말탄 군사들이니, 적병을 넓은 들로 몰아 철기를 달려서 무찌른다면 아니 녹을 절병이 없을 것일세. 염려할 것 없네." 하고 달래강 앞에 탄금대에 결진을 했다.
..... 당시의 조선군은 여곳에서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고, 왜군은 우리나라 활보다 유리한 조종을 가지고 있으며 숫자도 훨씬 많았다...
일본 선봉대가 신립의 조선군을 맞딱뜨리기전 문경새재를 넘는 상황이다
상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문경새지를 넘는 외길이 있을 뿐이다.
적장들은 이 길을 몹시 꺼려하고 무서워했다.
문경 남쪽에는 옛 성터가 하나 있는데 이곳을 검재라고 불렀다. 경상좌도와 우도로 갈라지는 길목이요, 두 평 산꼴짜기 는 자루처럼 되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는 임란전부터 조선의 산천 형세를 여러 차례 정탐해서 건너간 중 겐소와 이라노 시케노부가 있었다.
왜장들은 문경을 지나서 새재로 길을 취하자면 이곳에는 반드시 복병이 있으리라 판단했다 왜병이 한양을 점령하는냐, 못하느냐, 하는 열쇠는 이 새재 싸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왜장은 조선안에 명장으로 치는 이일과 신립이 있는 것도 잘 았았다....
왜중 겐소는 새재에 복병이 없다 하니 더 무서웠다. 척후병을네 번씩이나 더 보낸 뒤에야, 비로소 서서히 행군을 조금식 시켜 보았다.
새재에는 조선 군사의 그림자 하나도 없었다......
왜군이 부산에 도착한지 2주만에 충주를 넘어선다.
4월 29일 신립의 패전소식을 접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무악재를 넘어 송도로 향한다.
일본의 진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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