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서양이 팽창하여 동양의 끝 극동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던 시기..
어떤 나라는 제국주의 대열에 어께를 나란히하고 어떤 나라는 주위의 격동하는 시기와 무관하게
독야청청 나가던 나라가 있으니 이때가 1800년대 후기이다
그당시 일본은 군사정권인 도쿠가와 막부가 집권한지 300여년이 지나고 도도한 서양의 문물이 밀려오면서 일본내부에서도 억눌렸던 번(지방정권)의 무사들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이들은 결국 서양세력을 받아들이는 막부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친왕양이의 형태로 나타나게되며 그중심에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인데 이들을 중심으로 조정의 이와쿠라 도모미와 손을 잡고 사쓰마 등 4개의 번의 무사들이 힘을 합쳐 막부를 무력으로 몰아내고 왕정복고를 이루어내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메이지천황의 메이지 유신이다
사쓰마 동향으로 개혁의 중심이 된 사이고와 오쿠보는 각번의 토지를 줄이고 번주들을 중앙조정의 신하로 끌어들여 지방번의 권한 축소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게 된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인 1860년에 미국의 페리호에 의해 강제를 문호를 열었지만, 메이지 유신후에는 1871년에 서양의 영,프,러 등의 각국에게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서양세력의 힘을 인정하여 일본의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기로 하여 개혁주최를 중심으로 서양을 직접 돌아보면서 학습하기로 한다, 존왕양이 세원훈중 사이보는 국내에 남아 내치에 힘쓰기로하고 나머지 두명인 오쿠보와 이와쿠라 그리고 젊은피 이토히로부미 등 당대의 실세들로 구성하여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그리고 독일등 서양에서 배우기위해 항해를 떠난다.
이들은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서양의 문물을 보고 다시한번 일본의 나아갈 방향을 잡고 어떻게 개혁을 해나갈지까지 독일에서 답을 얻어 오게 되는데 그당시 독일은 철혈정책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가 정권을 잡던 시기로 그는 오쿠보에게 조언한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제정치가 이뤄야져하며 이를 위해 쇠(무기)와 뜨거운피(군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이에 오쿠보는 크게 감명을 받고 실제로 일본을 개조하는 정책 실현 방향은 비스마르크에게서 배운 방법으로 실현해 나가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박정희의 쿠데타와 10월 유신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성공적인 유신에 비하여 박정희의 유신은 뭐가 문제일까??
서양에서 3~4달동안 너무나 많은것을 습득하고 온 이들은 일본을 개혁하고자 하지만 그동안 국내에 남아 내치를 하던 사이고와 뜻이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그중에 대표적인게 정한론으로 서로 부딪히게 된다. 그당시 조선은 대원군이 강력하게 쇄국정책을 밀어부치던 시기로 일본에 대한 외교는 부산 동래항을 통해서만 접수를 받고 있었는데, 일본은 막부가 무너지고 천왕으로 정권이이양되었지만 조선은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 천왕의 문서를 접수조차 하지않게되자 일본내부에서는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자는 사이고를 중심으로하는 정한론파와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며 더 힘을 키운 다음에 정벌해도 늦지 않다는 오쿠보를 중심으로 하는 해외에 다녀온 파 간에 양세력은 양분되고 결국 서양문물의 큰세상을 보고 왔던 오쿠보를 천왕은 손을 들어주고 사이고는 정권에서 밀려나게 되면서 정한론은 잠시 뒤로 밀어지게 된다.
그러면 왜 일본은 내부가 혼란이 정리되고 혼란을 분출시킬 때면 정한론이 고개를 드는데 그뿌리는 무엇인가??
일본의 옛 역사서로는 고사기(서기 712년) 3권과 일본서기(서기 720년)에 30권이 있는데 이고서에 의하면 일본건국 신화에 조선국을 경영했다는 내용이 나오며, 진국황후시기에 임나일본부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에대한 식민지의 정당성을 기초로한다 그리고 이를 이어 도쿠가와 막부 중기에 "해국병감"과 "삼국통람도설"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조선침략 기술과 조선국 지리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이를 기록한 이는 히야시 시헤이인데 이의 제자들이 막부 말기에 정한론자로 연결된다 이들이 이토히로부미, 야마가다아리도모 등으로 특히 이토는 가장 존경하는 이를 자기와 출신이 같으면서 일본의 정권을 잡았던 도요토미히데요시로써 그를 존경하여 그의 뜻을 그대로 쫓게 된다.
한편 사이고와의 권력투쟁에서 이긴 오쿠보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에게 배웠던 강력한 경찰권한을 이용하여 전제정치를 통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안으로는 지방정권에서 무사들이 칼을 차고 다닐는 것을 금지하는 등 중앙집권화 이뤄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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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번의 외교를 통해서 오쿠보는 국제외교에서 힘의 논리를 확신하게 되고 주변강국을 이겼다는 자신감을 통해 미뤄뒀던 남은 문제 즉 조선 개방(침략)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시작은 1875 윤요호사건이다 이는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당시 일본은 동래를 통해서만 한정된 무역과 외교를 허락받는 상태인데 일본은 강화도에 윤요호를 파견한다.
강화도는 한양과 바로 바닷길이 연결되어 이양선들이 자주 나타나는 군사적 중요지역으로 일부러 일본은 민감한 지역을 골라 조선의 방어적 공격을 유발시키고 나서 일본은 군함의 함포사격 강화도 진지와 영종도를 초토화시키고 유유히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 강화도에서 만나서 윤요호사건을 수습하자며 제의한다, 윤요호의 무력앞에 무기력함을 알게된 조선은 권력도 변화가 있어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 친정이 이뤄지고 서양의 문물을 인정했던 민왕비의 개방정책이 맞아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미 서구의 여러나라와 외교를 학습한 일본과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선과의 맺은 강화도조약이 양국에게 평등한 조약이 될리가 없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측량이 자유롭게 할수 있고 일본인의 조선개방항구내에서 치외법권이 인정되는등 조선내부는 준비할 틈도 없이 물밀듯이 밀려드는 문호는 일본과 서양각국에게 무기력하게 차츰차츰 잠식되어가게 된다.
난 이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첫째 일본주요역사소설을 봤지만 일본인의 작품이라 이름도 복잡하고 지역 그리고 문화가 다소 난이하였는데 우리나라 작가가 쓴 일본역사소설이다보니 쉽게 받아들일수 있어 반갑기까지 하였다.
둘째는 일본하면 무조건 배척하고 부정하기만 한것은 아닌지 사실 일본의 역사에 대해 특히 일제 침략시기에 대해 우리나라 작가가 쓴다는 것은 정치에서 주사파가 국회에 입성하는 것 못지 않은 조심스런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만큼 우리나라에는 가리고 제한되는게 많은 상황이다...
먼저 그들을 알아야 다음 세대에도 대책이 세워지듯 그들이 강력한 제국주의로 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당시 어떻게 변화의 시기를 대처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당시 일본은 지방무사들에 의해 나라의 개조를 이뤘지만 조선도 권력에 물들지 않은 개혁주의자 대원군이 막강한 힘으로 조선을 개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개방정책을 통한 성공적인 받아들였지만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더 굳게 닫아 걸고 내부의 문제에만 매달렸다 그차이가 뭘까? 일본의 위치상 서양이라는 침을 먼저 맞아서일까? 그것만은 아닐것이다. 청나라도 일본 못지 않은 서양의 침략을 받았지만 일본만큼 역동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어렴풋이 느켜지는건 청이나 조선은 기득권층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 받아들이다 보니 한계가 있지만 일본은 막부라는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력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는 것과 그리고 오랜역사동안 유지해온 천왕중심의 충성된 단결심이 일본의 자산이고 근본적인 힘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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