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의 해인사 하루코스로는 다소 벅찬 거리이다 하지만 가보고 싶다 일찍 서두르면 되지 물이조아로 새벽 기상은 문제 없지 않은가..
4시반에 일어나 서둘러 보지만 역시 5시는 무리던가..주먹밥 사고 집에 있겠다는 애들 달래고 씻기고하니 출발시간이 6시가 된다
초행길이지만 네비를 따라가면 문제 없다 더구나 새벽 나서는 길이기에~ 역시 조금 서두르면 돈,시간을 벌 수 있다 차는 경부를 거쳐 상주나들목로 인도하더니 낙동 나들목에서 또다른 고속도로로 인도한다 흠 나들목을 몇개 거친다 그리고 항상 느끼는거지만 호남평야를 달리는 것에 비해 산이 많아 지세가 험하다
첫번째 도착예정지는 대장경 천년관 그리고 식사 후에 14시에 해인사로 가기로 일정을 잡았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다 9시반..생각보다 멀지 않은 거리이다 몇년전부터 대장경 축제 행사가 진행되는 곳이다 근데 주차장에 들어서보지만 아무도 없다 문열 시간이 10시인가 안으로 들어가니 관람객이 없을 뿐 문은 열었다 아무도 없으니 우리 가족의 독무대...대장경 만드는 과정과 천년을 지나도록 목판 대장경이 유지되는 과학적 근거 그리고 5D동영상은 대장경이 처음 강화도에 제작된 배경과 이곳 해인사로 옮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 여기서의 기초지식을 가지고 해인사에 가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게 되면 나름 부족하지 않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것지..
11시 반에 천년관을 나서 다음 해인사로 향한다 해설사 예약 시간이 14시 이므로 2시간 반의 여유가 있다 식사하고 만나기로 한 해인사 일주문까지 걷는 시간 30분하면 부족하지 않는 시간...식당은 해인사 입구로 가서 잡는다 우연히 들른곳인데 식당이 김종국 사진이 많이 걸려 있다 물어보니 조카란다 식사 후에 해인사 일주문까지 거리는 7백미터 사묵사묵 걷는다 사찰입구에는 산나물과 막걸리집 커피파는 집그리고 좌판대에 불교용품을 내놓은 집이 있다 길 양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벗나무 들이 있지만 계절이 겨울이라 무성한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다 입구에 거의 다다르니 유명 스님들의 사리탑을 지나고 일주문이 나온다
[가야산 해인사]
사찰에 들어가기위해 보통 3개~4개의 문이 있는데 맨 앞에 있는 문으로 양쪽에 두개의 다리위에 현판에는 산이름과 절이름이 적혀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이다
입구를 들어서니 고목이 보인다 처음 해인사 세울 때 신라 애증왕 당시에 두스님이 왕후의 병을 고쳐주고 왕의 지원을 받아 사찰을 짓게되는 의미로 심었던 나무가 1945년 까지살다 죽은지 70년 된 고목이다
이곳 해인사는 부처님의 뵙기위한 문이 네개를 통과해야하는데
두번째 문이 사천이 있는 봉황문이고 세번째가 해탈문 그리고 구광루를 지나면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중심 법당으로 모시는 이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일반적으로 절이 흔히 모시는 석가모니부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가 모셔져있다.
대적광전의 정상 치미를 보면 부여의 백제왕궁에서 봤던 모습과 같은 치미가 좌우 양쪽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글씨는 안평대군이 쓴 글씨라고 한다 그리고 세로로 내려쓴 편액의 글씨는 6개중 좌측 4개는 대원군의 글씨이고 오른쪽 2개는 고종이 쓴 글씨로 자세히 보면 글씨체가 차이가 남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해인사에는 유난히 명필들의 글씨가 많고 인물들도 다양한 인물들이 해인사를 거쳐 흐르는 홍류동 계곡과 가야산을 벗삼아 수도한 곳으로 유명하다
대적광전 뒤쪽으로 가면 팔만대장경이 소장된 장경각을 만날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역시 국보 52호이면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장경각은 조선 초기에 세워져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팔만대장경이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세 번의 큰 수난을 겪었다.
그 첫 위기가 임진왜란이다. 당시까지 가야산은 십승지지의 오지로 전혀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인사가 너무 깊은 오지라 왜군이 들어오지 못한 덕분에 다행히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총리는 대장경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양이 너무 많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규모는 세로로 쌓으면 경판수가 8만1,350장으로 백두산 높이가 되며, 4톤 트럭 70여 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문에 능숙한 사람이 하루 8시간씩 30년을 꼬박 읽어야 전부 읽을 수 있고, 5,200만 자의 글자도 마치 한 사람이 휘호하듯이 똑같은 필체를 자랑한다.
6·25 전쟁 때에도 해인사가 폭격당해 사라질 뻔했다. 지리산의 북쪽 끝 지점과 연결되는 가야산은 빨치산의 거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연합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김영환 대령이 폭격하지 않고 직접 소탕에 나서 보호했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동안 목판 팔만대장경이 유지되어온 배경은 무엇일까..
장경각 내부는 자체 온습도 조절 및 통풍 조절 기능이 자동으로 되어 변화를 막는다고 한다
첫째 장경각 바닥에 구성이다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의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또한 통풍 조절을 위해 건물 앞쪽은 위쪽과 아래쪽의 크기를 달리하여 격자형의 문틀로하고 뒤쪽은 위 아래를 배치를 반대로하여 통풍이 잘되게 배치하였다
대적광전의 좌측으로 올라가면 신라시대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빈공과)에 합격하고 고운 최치원의 전설이 어린 고목이 있다
최고은은 당나라에 있을때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황소토격문을 작성하여 뛰어난 글귀를 읽던 황소가 말에서 떨어졌을 정도로 당나라에도 이름을 날리다 고국 신라에 헌강왕으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돌아와서 벼슬을하고 쓸어져가는 신라를 개혁하려했지만 골두품의 한계에 부딪혀 벼슬을 그만 두고 이곳에서 쓸어져 가는 신라를 한탄하다 보냈다고 한다 그당시에 최고은이 지팡이를 거꿀로 꼿아놓은게 지금도 남아 천년고목으로 자라고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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