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역사는 우리역사이다
중원을 복속하고 한족을 지배했던 곳이 청나라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 조선은 몹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청은 충분히 조선을 복속하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죠."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우리 시조는 신라인"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금나라 태조와 정확히 어떤 혈연관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金之始祖諱函普,(금의 시조는 이름이 函普였다)
初從高麗來,(원래 그는 고려에서 왔다)
年已六十餘矣.(그가 고려를 떠날 때 60대였다)
兄阿古好佛,(그의 형 阿古는 불교를 숭상했는 데)
留高麗不肯從,(그와 함께 고려를 떠나기를 거절하면서)
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말하기를, 우리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만날 곳이 필요하다. 나는 갈 수 없다)
獨與弟保活里俱.(그래서, 동생인 保活里하고만 왔다)
始祖居完?部僕幹水之涯,(그는 幹水 근처의 完?로 갔다)
保活里居耶懶.(保活里는 耶懶로 갔다)
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그후, 胡十門이라는 부족이 曷蘇館이라는 곳을 태조께 바쳤는 데)
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말하기를 그들은 시조와 같은 삼형제의 후손이며)
蓋自謂阿古之後.(그들은 阿古의 후손이고)
石土門、 迪古乃, 保活里之裔也.(石土門과 迪古乃은 保活里의 자손들이라는 것이다)
及太祖敗遼兵于境上,(후에 태조가 요의 군대를 국경에서 격퇴했는데)
獲耶律謝十,(요의 장군 耶律謝十을 사로잡고)
乃使梁福, 斡答刺(태조는 두 명의 사절 梁福、斡答刺을 보내서)
招諭渤海人曰(발해 사람들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女直、渤海本同一家」("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가족이다"라고 했는데)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이것은 원래 다같이 勿吉(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인용 끝>
위의 내용에서 밝혀진 대로, 금金 태조 '아구타阿骨打'는 고려高麗의 후손이었습니다. 또한 그 후손이었던 청淸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역시 그러한 배경 즉, 고려高麗의 후손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 '애신각라愛新覺羅'에서 신라新羅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 단서 중의 하나를 흉노는 금金 태조 '아구타阿骨打'의 6대조, 청淸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22대조 라는 고려高麗 사람 '김함보金函普'의 성性인 '김金'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정확히 신라 新羅계인지 가야加耶계인지는 알수 없으나, 당시 고려高麗의 김金씨들은 모두 신라新羅를 거쳤다고 생각됩니다. 금金의 태조 '아구타阿骨打'로 부터 6대조라고 한다면, 그의 즉위(서기 1115년)로 부터 대략 150여년을 앞당겨 생각할수가 있습니다. 그 자신의 나이를 최소 30세 이상으로 보고 그로부터 6대조를 20년으로 생각한다면, 대략 150여년 전의 '김함보金函普'는 실제로 신라新羅가 고려高麗에 합병된 시기(서기 935년)에 전후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즉, 기록의 원래의 내용은 고려高麗 사람 '김함보金函普'가 아닌 신라新羅 사람 혹은 유민流民 '김함보金函普'였을 가능성이 더욱 높은 것입니다. 신라新羅가 고려高麗에 합병되자 고려高麗의 화합정책을 뿌리치고 북쪽으로 이동한 신라新羅 사람이었다고 보는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위의 기록에서 나타난 '김함보金函普'의 형 '김아고金阿古'에게서도 찾을수 있습니다. 불교를 숭상했다는 그의 형은 숭불崇佛정책을 펼친 고려高麗를 택한것으로 보여집니다.
결국, 신라新羅 사람 '김함보金函普'는 고려高麗에 반대해 북쪽으로 이동해왔으며, 그의 후손 '아구타阿骨打'는 후에 주변의 여진女眞족을 규합하여 거란契丹족의 요療왕조를 무너뜨리고 금金왕조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금사金史>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바로, 요療를 가리켜 발해渤海라고 칭하는 부분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대진大辰(발해)을 무너뜨리고 그 지역을 차지한 요療의 세력중에서도 대진大辰(발해)의 유민출신 혹은 그 지역에 근거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여진女眞족과 같은 뿌리임을 자각케하는 표현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금金왕조를 일으킨 여진女眞족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고 전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다만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김준의 직계 아들인지 몇 대를 거친 손자인지는 의견이 다양하다. 어느 것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인데,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유민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기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이라는 주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이기도 한 백암 박은식의 소설 '몽배금태조'(꿈 속에서 금 태조를 만나다)를 통해 그의 북방민족관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 소설은 일제 식민지 시절 '무치생'(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란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서생이 만주로 떠나갔다가 꿈 속에서 금 태조 아골타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오호라. 우리 조선족과 만주족(滿洲族)은 모두 다 단군대황조의 자손으로 오랜 옛날에는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기도 했고, 또 서로 통하기도 했는데 필경은 통일이 되지 못하고 분리(分離)되면서 두만(豆滿)과 압록(鴨綠)을 경계로 이루어 양쪽의 인민(人民)이 왕래도 하지 못하고 각기 살은 지가 천여년이 되었다. 이에 따라 풍속이 같지 않게 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서로 남같이 생각하면서 다른 종족처럼 되었다. … 대개 대금국의 태조황제는 우리나라의 평주(平州)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이고 그 민족의 역사로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다른 이름으로 발해족은 마한족(馬韓族)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金國)의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의 한 작은 부락으로 흥기하여 단숨에 요나라를 멸하고 다시금 북송(北宋)을 취하여 중국 천지의 주권을 장악하였으니
이렇게 한탄하는 무치생을 금 태조 아골타가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긴 하다.
"너는 조선의 유민(遺民)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나라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다. 짐은 지금 천국에 있는 고로 인간 세상의 일은 직접 간섭하지 않지만 하늘에서 오르 내리는 영명(靈明)이 인간 세상을 감찰하고 있으니 현재 조선민족이 떨어진 경우와 고통스런 정황을 보는 것이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스스로 싸워 강한 자를 사랑하시고 자포자기한 자를 싫어하시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청淸 태종은 삼전도 항복때 인조와 조선의 관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원래 우리는 고려高麗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다. 그런데 왜 그대들은 동족을 아니 따르고 명明나라를 돕는가. 이해할 수 없다."
청淸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는 1592년 조선朝鮮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새끼 왜구들을 성상께서 허락하신다면 제 휘하의 2만 병사를 이끌고 가 한달음에 바다 속으로 처넣어 버리겠습니다"라는 요지의 장계를 올렸으나 조선 관료들은 격식을 갖추지 못한 문장이란 이유로 이를 묵살했습니다.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자신이 금金 태조 아쿠타阿骨打의 16대 손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금金 태조는 고려高麗 사람 김함보金函普의 6대 손입니다.
만주滿州족을 이끌고 후금後金(淸)을 세운 '누르하치努爾哈赤'는 그 성姓이 '애신각라愛薪覺羅'이다.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자신의 본래 성性을 버리고 '애신각라愛新覺羅'를 새로운 성性으로 삼으면서 공표하기를, "우리는 신라新羅의 아들들이니, 신라新羅를 사랑愛하고 신라新羅를 생각覺하여, 우리 뿌리를 잊지 않아야 하니 성性을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하노라" 하였다
앞서 흉노는 금金왕조, 후금後金(淸)왕조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와 동일하게 진행되었음을 그들의 성씨性氏, 그들 부족의 변천과정을 통하여 추론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한韓민족이라는 것은 소위 삼국시대三國時代에서 남북시대南北時代 그리고 고려高麗를 거치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의 커다란 축軸을 형성해왔던 북방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워버리고 다시 조선朝鮮을 거치면서 그 자리에 야만, 오랑캐를 채워넣은 결과물입니다.
그 조선朝鮮을 이어받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중심의 사관이 바로 한韓민족 중심사관이라고 흉노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한韓민족 중심의 사관은 일견一見, 민족民族을 중심으로 하는 사관으로 보일수 있으나, 오히려 현재의 민족民族만을 중심으로 하는 결과로써 과거의 역사를 분리시켜버리는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금金왕조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청淸으로 개명하기 전의 후금後金왕조의 역사와 병자호란丙子湖亂 이전의 청淸왕조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청淸왕조는 급격한 한화漢化가 진행되어 스스로 그 정체성을 송宋대 이후의 한漢족 문화권에 편입시킴으로써 우리와 같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뿌리에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고 봅니다.
금金왕조의 경우 역시, 당대當代의 시각에서 살펴보아 고려高麗왕조와 같이 누대累代에 걸쳐 내려오던, 양계兩係의 정통성 다툼을 지속하였던 우리 역사의 한 왕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의 한韓민족 중심,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에서 취한 역사적 정통성을 우리는 스스로 교정해야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됩니다.
바로 현재의 좁은 민족民族개념으로는 과거의 역사를 모두 포함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몽골족, 여진족, 선비족, 흉노족, 일본인 등은 모두 한韓민족" 이라는 명제는 성립할수가 없는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족, 여진족, 선비족, 흉노족, 야마토민족, 한민족 등은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 또는 배달겨레"라는 식의 보다 포괄적인 개념의 수정이 선행되지 않고는 아무리 그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하여도 그 기본적인 사고思考 자체의 모순 때문에 성립될수가 없다는 것이 흉노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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